조선시대 왕들의 자녀 수 조선의 왕과 궁중문화


태조(太祖) 네이트 인물정보





  • 생몰년 : 1335-1408
  • 시대 : 조선
  • 별칭 : 이성계(李成桂)/이단(李旦)
  • 분야 : 왕실 > 왕 > 왕
태조(太祖)에 대하여

태조(太祖)
1335(충숙왕 복위 4)∼1408(태종 8). 조선 제1대왕.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晋)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영흥)출생.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하였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비로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으며, 같은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정월 친병(親兵:私兵)2, 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 제일 먼저 입성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대파,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崔濡)가 원제(元帝)에 의하여 고려왕에 봉하여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1만명을 인솔,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오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하였다. 이무렵 여진족은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 함주까지 함락시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그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격퇴함으로써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뒤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하였으며,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하였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하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출진,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安邊策)을 건의하였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北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대파하였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으며,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였다. 이해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회군을 단행하였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곧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무렵 그는 신흥정치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으며,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였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하였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393년 9월에 착공, 13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태묘·사직·궁전 등과 숙정문(肅靖門:北門)·흥인문(興仁門:東大門)·숭례문(崇禮門:南大門)·돈의문(敦義門:西大門)의 4대문, 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홍화문(弘化門)의 4소문(小門) 등을 건설하여,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한편으로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1394년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숭유척불정책(崇儒斥佛政策)을 시행하여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그는 새 왕조의 기반과 기본정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방원(芳遠: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1398년 태조의 와병중에 방원은 세자인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 그들을 살해하였으며, 곧이어 방석·방번(芳蕃) 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하여 방과(芳果)로 결정하였다. 태조는 방석·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은 데 대해서 몹시 상심하였다. 그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방원이 세자로 책립, 곧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특히, 함주에 있었을 때에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에서 죽었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고,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며, 능은 건원릉(健元陵: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이다.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龍飛御天歌,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 韓國史―近世前期篇―(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2)
  • 李成桂(河炫綱,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65). 〈河炫綱〉

세종 이도 2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 (양력 5월 15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示+匋), 자는 원정(元正)이다.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정안대군과 부인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왕이 태종으로 즉위하면서 충녕대군으로 진봉했다가 형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1418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섭정을 하며 군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 측근들이 사형당하였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황희,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 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경제∙국방∙예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20세기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김종서∙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왕자 책봉

이도는 1397년 당시 정안대군이던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안대군이 왕세자가 되면서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卞季良)에게 수학하였다.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부왕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아서 숨겼다고 한다.

그 뒤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인 성리학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숨겨둔 책들을 찾아내 독서를 계속하였다.

왕자 책봉과 형들과의 경쟁
1412년 16살에 둘째형 효령군(孝寧君)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일종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형 효령대군이 세자의 자리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독서와 학문연구에 정진하기도 한다. 넷째 동생으로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유난히 각별했는데, 그러나 성녕대군은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양녕대군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후대의 역사학자 박시백은 "충녕대군의 행동이 세자를 향한 충정이었을까, 아니면 도전이었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세자 책봉과 즉위

그 뒤 1418년에 태종이 맏형이자 동복형인 양녕대군을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黃喜)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해 6월 22살의 그를 새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에게 세자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결국 부왕이 금지한 불교에 호감을 갖다가 심취하게 된 효령대군은 바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양녕대군은 광주로 내쳐지게 되었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왕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재위 기간 업적

유교 정치의 기틀 마련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말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화했다.

또한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던 이조판서 황희는 1413년 초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左遷)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南原)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1422년(세종 4년) 부왕 태종은 그를 소환하도록 권고,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즉시 유배에서 불러들었다.

황희는 매관매직으로 돈을 벌었고 남의 아내와 간통했다고 실록은 적는다. 그는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말하는 호인(好人)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세종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용했다. 1423년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고 민심을 얻었다. 세종의 신임을 얻은 그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과 비호를 받아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대외 정책세종은 명(明)과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馬)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김종서(金宗瑞), 이천(李蕆)과 이징옥(李澄玉)에게 6진(鎭), 4군(郡)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李從茂)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 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조선 앞바다는 그로 인해 얼마간 왜구로부터 잠잠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실책: 정찰대 선발 때 제비뽑기를 선발 방법으로 채택해 사기를 떨어뜨렸고, 결국 의욕 없이 나간 정찰대 중 180명이 왜병의 기습에 죽고 말았다.

국방 정비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세견선(歲遣船)을 허락하는 등으로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길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이개(李塏)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를 연구하게 된다.

그는 문자 연구를 위해 당시 중국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을 만나려 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허용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세종은 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을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을 만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마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遼東)에 귀양 가 있자 일행은 그를 만나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그는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3년여의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여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반세기만에 지방 하층민에게 까지 쓰이게 되었으나, 암클, 언문등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선생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한, 그래서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 일이다. 이때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신하 중에는 최만리(崔萬理)와 하위지(河緯地)가 있었는데, 최만리는 청백리로 인정받았음에도 세종을 높이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폄하되었다 하여 그의 후손들은 복권운동을 시도하고 있다.

의정부 서사제 실시
세종은 내각책임제의 원조격인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풍질(風疾)·안질(眼疾) 등을 평생 앓았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黃喜)였기 때문이다. 여비(女婢)들의 다툼에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했고, 종의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였다.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희는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자신을 향해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면박하자 도리어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년) 87세로서 은퇴하였다.

세종대의 또다른 정승은 맹사성(孟思誠)으로 그는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 신뢰하여 황희와 함께 그를 중용하였다.

과학의 발전
세종은 정인지, 정초(鄭招),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 혼상(渾象),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437년. 천문 기구 겸 시계),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漏壺), 1442년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8]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 등에 명해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曆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하였다.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그리고 1436년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서적 편찬에 힘썼다.

1431년과 1446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화포(地字銃筒)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했다.

문물의 발전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을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케 하였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한편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법전 정비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정책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田稅制度)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생애 후반

가정의 불행
재위 초반에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임질(현재의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최후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은 현대의 의학 용어인 뇌경색과 뇌출혈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은 비만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은 뇌경색 직전인 상황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세종대왕의 막내아들, 세종의 6남]집 동별궁에서 훙하다.[*1450년 음력으로 2월17일 별세](후략)

– 세종 실록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2월 17일(임진) 1번째 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전략)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서기1397년 정축]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

–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1번째기사


참고로 다른 한자의 공정왕(恭靖王)은 태조의 2남(방과)이며, 태종의 형이었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定宗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 7년, 1681년에 받았다.)


사후


1450년(문종 1) 3월 10일 시호(諡號)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고 정하였다.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시호(諡號)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지(天地)의 큰 덕은 비록 다 형용하여 말할 수 없지마는,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리(情理)로서는 다만 미덕(美德)을 나타내는 데에 간절하므로, 삼가 상헌(常憲)에 따라서 이에 휘칭(徽稱)366) 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聰明)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367) 를 높이고 종(宗)368) 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人倫)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包容)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調和)되니, 문치(文治)는 일월(日月)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수방(殊方)369) 에서는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中國)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恩寵)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貞符]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일조(一朝)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370) 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371)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追崇)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의령(懿靈)372) 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玉冊)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홍명(鴻名)373) 을 누리고, 순희(純禧)374) 를 거듭 주셔서 무궁(無窮)한 보조(寶祚)375) 를 말없이 도와주소서.”【태백산사고본】 【영인본】 6책 237면 문종실록 1권, 즉위년 5월 21일(갑자)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에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이장 후 1년도 안돼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되었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군에 위치해 있으며 소헌왕후와 한 봉분안에 함께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세종 사후의 정세
세종의 안정적인 치세 이후 조선의 정치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세자이자 장남인 문종이 보위를 이어받은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장손인 단종이 12살 이라는 어린 나이에 문종에게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궁궐에는 수렴청정을 해줄 대비나 왕대비가 없는 상황에 문종이 유지를 남겼던 신하들에게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양대군등 왕족들의 세력이 팽창해 가며 정치적으로 불안함이 가중되었다.

단종의 재위 1년 만인 1453년에는 숙부이자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 세력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일어나 세종대부터 관직에 진출하여 활약하였던 많은 대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국내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단종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조정에서 제거되어 유배되고 숙부 안평대군은 강화도 유배 후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뒤를 이어 금성대군 사건을 일으켜 단종을 지지하던 왕족들과 그 세력들을 다시 한번 숙청한다.


결국 단종은 보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형식상의 선위를 하면서 왕위를 찬탈당하였다. 이어 1456년에는 일명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는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 복위 사건에 연루된 6명과 이에 관련된 70여 명을 포함하여 조정에서 또 한 번 대숙청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주도하였던 세력의 공격으로 단종은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당하고 영월에 귀양을 가서 17세에 죽었다. 이어 금성대군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부터 선위를 받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불과 5년 만에 단종을 지지했던 왕족들과 세종의 치세에서 학자와 관료로써 세종이 남긴 많은 업적들에 큰 활약을 하고, 단종을 지지한 많은 관료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가족 관계

부: 제 3대 태종
모: 원경왕후 민씨
왕비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정소공주(貞昭公主)
왕세자 향(王世子 珦) - 문종(文宗)
왕세손 홍위(王世孫 弘暐) - 단종(端宗)
정의공주(貞懿公主) 하가(下嫁) 연창위 안맹담(延昌尉 安孟聃)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 - 세조(世祖)
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
임영대군 구(臨瀛大君 璆)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평원대군 임(平原大君 琳)
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
후궁 : 영빈 강씨(令嬪 姜氏, 강석덕의 딸)
화의군 영(和義君 瓔)
후궁 : 신빈 김씨(愼嬪 金氏)
계양군 증(桂陽君 璔)
의창군 공(義昌君 玒)
밀성군 침(密城君 琛)
익현군 연(翼峴君 璭)
영해군 당(寧海君 瑭)
담양군 거(潭陽君 璖)
후궁 : 민정혜빈 양씨(愍貞惠嬪 楊氏)
한남군 어(漢南君)
수춘군 현(壽春君 玹)
영풍군 전(永豊君 瑔)
옹주(翁主) : 일찍죽음
옹주(翁主) : 일찍죽음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후궁 : 귀인 최씨(貴人 崔氏)
후궁 : 숙의 조씨(淑儀 曹氏)
후궁 : 소용 홍씨(昭容 洪氏)
후궁 : 숙원 이씨(淑媛 李氏)
정안옹주(貞安翁主) 하가(下嫁) 청성위 심안의(靑城尉 沈安義)
후궁 : 상침 송씨(尙寢 宋氏)
정현옹주(貞顯翁主) 하가(下嫁) 영천부원군 윤사로(鈴川府院君 尹思路),
후궁 : 사기 차씨(司記 車氏)
옹주(翁主) : 일찍죽음

건강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1948년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그린 국가표준영정이나 이당 김은호(金殷鎬)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풍질(風疾)·안질(眼疾) 등을 평생 앓았다. 후대의 사학자 이덕일은 그가 당뇨를 앓았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일화
조선 태종이 세종이 어렸을 때 독서를 멈추지 않자, 건강을 염려하여 세종의 책을 모두 숨겨 버렸다. 이 때 세종이 책이 없음을 보고 황급히 자신의 방을 뒤지다가 병풍 뒤에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세종은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책을 1,000번을 읽었다고 한다.

하루 일과
5시 ~ 5시 30분 : 기상
5시 30분 ~ 6시 : 조회
6시 ~ 7시 : 공부 및 독서
7시 ~ 8시 : 아침 식사
8시 ~ 9시 : 문안 인사
9시 ~ 11시 : 국가 회의
11시 ~ 12시 : 점심 식사
오후12시 ~ 1시 : 국가 회의
1시 ~ 3시 : 공부 및 독서
3시 ~ 5시 : 상소 검토
5시 ~ 6시 : 숙직 관리 확인
6시 ~ 7시 : 공부 및 독서
7시 ~ 8시 : 저녁 식사
8시 ~ 9시 : 문안 인사
9시 ~ 10시 : 공부 및 독서
10시 ~ 11시 : 구언
11시 ~ 12시 : 취침 준비

기타
아버지 태종이 외척을 숙청한 반면 세종대왕은 이들과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정실인 소헌왕후는 세종의 고모부인 심종의 조카딸이다. 심종은 심온의 동생이다.

그의 첫번째 후궁은 처조카인 영빈 강씨로 심온의 외손녀이며 소헌왕후의 이종 조카딸이자 동서 강석덕의 딸이다. 소헌왕후 소생 자녀들과는 이종사촌이면서 서모, 적자 관계가 된다.

세종대왕의 세번째 동서인 노물재는 세종의 이종 사촌 형제가 된다. 심온의 세 번째 사위 동지돈녕부사 노물재는 교하 노씨로 우의정 공숙공 노한의 아들이다. 또한 세조 때의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은 그의 이종질이자, 처조카가 된다.심온의 사돈이며 노물재의 아버지인 노한은 세종의 이모부로서, 태종의 장인인 여흥백 문도공 민제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처남인 심준은 외사촌 매제가 된다. 심온의 장남 영중추원사 심준은 민제의 셋째 아들인 지돈녕부사 여원군 민무휼(閔無恤)의 사위가 된다.

형인 양녕대군의 17대손 이승만은 조선왕조를 경멸하고 증오하였으나, 조선의 인물 중 세종대왕과 정약용(丁若鏞),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유독 높이 샀다. 박정희 역시도 조선의 인물 중 세종대왕과 정약용, 충무공 이순신은 유독 높이 평가하게 된다.


세종 이도

‘성군’ 또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는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이 금기시되다시피 했으며, 초인화·신화화된 부분마저 있다. 그러나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 해도 세종이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태종의 전격적인 결단,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조선의 제 4대 왕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이고, 시호는 장헌(憲)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이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은 세자 이제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태종실록]을 통해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반면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까지 군사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와 6조, 그리고 상왕이 함께 의논한다는 조건부 양위이긴 했지만 전격적인 결단이었다.

 

그렇게 조선 제4대 왕에 오른 세종의 나이는 당시 스물 둘.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왕세자로 책봉되는 바람에 준비가 부족했다. 집권 초기 대부분의 사안에 “상왕의 뜻이 이러하니” 또는 “상왕께 아뢰어보겠소.”라는 말을 반복해야 될 만큼 어려운 입장이었다. 엄한 아버지의 테스트를 받는 갑갑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세종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무섭게 공부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 David Hepworth at ko.wikipedia.com>

 

 

호학의 군주,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이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법학∙천문∙음악∙의학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본인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 외에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다고 했다.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는 태종의 말이 전할 정도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사실 세종은 그저 경전의 문구나 외워 잘난 척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생각을 하라고 학자들에게 주문하고는 했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을 행사하게 된 세종은 태종이 만들어놓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을 완성해나가는 방법으로 세종이 택한 방법은 매우 학구적이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사항까지 규정해나갔다. 작은 법규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쭉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다.

 

 

조선의 제도와 학문, 예술의 기틀을 잡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들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로워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자치통감] 완질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주석서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는데, 이 주해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과 사서에서 찾아낸 제도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지방관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인문지리∙풍습∙생태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고, 이를 수합하여 편찬했다. 많은 자료를 간행하려다 보니 인쇄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세종 치세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했다. 

 

물론 이렇게 많은 내용을 세종 혼자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농업∙지리∙측량∙수학∙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조세∙재정∙형법∙군수∙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이때 정해진 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과학기술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 초에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했으며,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뒤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세종의 위대함은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한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국사를 돌보던 세종은 결국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hendry/185985727>


사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세종 최대의 업적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종 단독 작품인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단.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세종의 말과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를 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라고 훈민정음 서문에 정인지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볼 뿐이다.

 

 

정신을 따라오지 못한 육체의 한계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해나가다 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스스로 “체력이 딸리니 생각이 이전처럼 주밀(周密)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보인다. 1440년부터는 독서도 거의 못했던 듯하다.

 

집권 후반기에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개편하고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토록 해, 왕에게 집중되었던 국사를 분산시켰다.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씩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왕자의 난 사건

왕자의 난(王子-亂)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창업 도상에서 일어난 왕자들의 왕위 계승권을 에워싼 골육상쟁이다.

태조는 왕비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와 소생으로 방우(芳雨)·방과(芳果)·방의(芳毅)·방간(芳幹)·방원(芳遠)·방연(芳衍)의 6남을 두었고,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소생으로 방번(芳藩)·방석(芳碩)의 2남을 두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이 중 이방원과 태조의 세자 이방석의 싸움이며, 제2차 왕자의 난은 이방간과 이방원의 싸움이다.

당시는 아직 건국 초창기여서 병권이 국가에 집중되지 못하였고, 왕자들도 각기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두 차례 난의 큰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난으로 왕위 계승 문제가 낙착되었으며, 사병을 혁파하여 모든 군대를 국가의 군대로 통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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